맨위로가기

포르투갈 제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포르투갈 제국은 포르투갈 왕국이 건설한 식민 제국으로, 1415년 세우타 정복을 시작으로 1999년 마카오 반환까지 존재했다.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브라질,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대항해 시대를 주도했다. 1822년 브라질 독립 이후 쇠퇴하여, 19세기에는 아프리카 식민지와 아시아의 일부 지역만 남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식민지 전쟁과 카네이션 혁명을 거쳐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독립했고, 1999년 마카오 반환으로 제국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포르투갈 제국은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CPLP)로 문화적 유산을 이어가고 있으며, 포르투갈어는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언어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포르투갈에 관한 -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포르투갈령 모잠비크는 1505년부터 1975년까지 현재의 모잠비크에 존재했던 포르투갈 식민지로,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동아프리카에 도착한 후 인도양 무역을 장악하며 건설되었고, 독립 전쟁을 거쳐 1975년 독립을 쟁취하였다.
  • 포르투갈에 관한 - 포르투갈령 티모르
    포르투갈령 티모르는 16세기 초부터 1975년까지 포르투갈이 지배한 동티모르 지역으로, 침향 무역 경쟁, 수도 이전, 국경 확정, 일본 점령, 독립 선언 및 인도네시아 침공을 거쳐 포르투갈 통치가 종식되었으며, 건축, 문화, 언어 등 여러 분야에 포르투갈 유산을 남겼다.
  • 포르투갈 제국 - 콩키스타도르
    콩키스타도르는 15세기부터 17세기에 아메리카 대륙 등을 정복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탐험가, 군인, 정복자들을 지칭하며, 종교적 열정과 경제적 이익을 위해 항해술과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활동했고,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포르투갈 제국 - 향신료 무역
    향신료 무역은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어 육상 및 해상 무역로를 통해 발전해 왔으며, 아랍 상인, 베네치아 공화국, 유럽 열강의 경쟁을 거쳐 종교, 문화, 음식 문화에 영향을 미쳤고, 현재는 인도가 세계 향신료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 근세사 - 르네상스 미술
    르네상스 미술은 14세기부터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미술 양식의 변화로,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 부흥을 바탕으로 인간 중심적 세계관과 사실적 표현 기법이 발달했으며, 회화, 조각, 건축 분야에서 다양한 발전을 이루었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거장들이 활약하며 유럽 각 지역에서 특색을 반영하여 발전했다.
  • 근세사 - 대항해시대
    대항해시대는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유럽 국가들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며 세계를 탐험한 시기로, 유럽의 영향력 확대를 가져왔지만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 파괴, 노예 무역 등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포르투갈 제국
지도
기본 정보
포르투갈 국장 (1481–현재)
포르투갈 국장 (1481–현재)
일반 명칭포르투갈 제국
고유 명칭임페리우 포르투게스 (Império Português)
기타 명칭포르투갈 해외 영토 (Ultramar Português), 포르투갈 식민 제국 (Império Colonial Português)
수도리스본 (1415–1808; 1821–1999), 리우데자네이루 (1808–1821)
공용어포르투갈어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국교)
정부 형태군주제 (1415–1910), 공화제 (1910–1999)
존속 기간1415–1999
통치자
군주주앙 1세 (1415–1433)
마누엘 2세 (1908–1910)
대통령마누엘 드 아리아가 (1911–1915)
조르즈 삼파이우 (1996–1999)
총리페드루 드 소자 홀스테인 (1834–1835)
안토니우 구테레스 (1995–1999)
역사
주요 사건세우타 정복 (1415)
인도 항로 발견 (1498)
브라질 식민지화 (1500)
이베리아 연합 (1580–1640)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 (1588–1654)
포르투갈 왕정복고 전쟁 (1640–1668)
마자간 포위전 (1769) (모로코 영토 상실) (1769)
브라질 독립 (1822)
고아 침공 (인도 식민지 상실) (1961)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1961–1974)
카네이션 혁명 (1974–1975)
마카오 반환 (1999)
동티모르 인도네시아 점령1974-1999
이전 국가포르투갈 왕국
계승 국가국가 구원 위원회/포르투갈 공화국
현재 국가
현재 영향권 국가앙골라
앤티가 바부다
바베이도스
브라질
카보베르데
미국
그레나다
기니비사우
적도 기니
모잠비크
포르투갈
상투메 프린시페
스리랑카
동티모르
마카오
싱가포르
우루과이
인도

2. 역사

포르투갈 제국은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존속했던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식민 제국 중 하나였다. 1415년 세우타 점령을 시작으로, 포르투갈은 15세기16세기에 걸쳐 광대한 해외영토를 확보하며 제국으로 성장했다.[8]



항해왕자 엔리케의 주도로 대서양 연안 탐험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15] 1419년 마데이라 제도, 1427년 아소르스 제도에 도달하여 정착했으며, 이곳에서 생산된 밀은 포르투갈로 수출되었다.[13]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희망봉을 돌아 항해하였다.[28]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신대륙 발견 이후,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여 유럽을 제외한 세계를 스페인과 양분하였다.[31][32]

  • '''인도 항로 개척과 동방 진출'''


1498년 바스쿠 다 가마인도의 캘리컷(코지코드)에 도착하면서 인도 항로가 개척되었다.[37] 1500년에는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브라질에 표착하였으나,[38] 당시 포르투갈의 주요 관심은 인도에 집중되어 있었다.[39]

1510년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고아를 점령하고,[10] 1511년 믈라카를 점령하여 동남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10]

1543년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에 표착하면서 남만 무역이 시작되었고,[10] 1557년 으로부터 마카오 거주권을 획득하여 동아시아 무역의 거점으로 삼았다.[10]

  •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동군연합 및 네덜란드와의 경쟁'''


1580년 포르투갈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펠리페 2세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140]

1602년부터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이 시작되어[10] 1641년 네덜란드가 믈라카를 점령하였다.[10]

1640년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다.[10]

  • '''제국의 쇠퇴와 멸망'''


18세기 브라질에서 금이 발견되어 경제적 부흥을 맞이했으나, 메슈엔 조약으로 인해 영국으로 금이 유출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1822년 브라질브라질 제국으로 독립하면서 포르투갈 제국은 큰 타격을 입었다.[193][194]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후 포르투갈은 식민지들의 독립을 승인했고, 1999년 마카오중국에 반환하면서 포르투갈 제국은 막을 내렸다.[216]

2. 1. 기원 (1139-1415)

포르투갈 왕국레콩키스타 과정에서 1139년에 독립 왕국으로 인정받았다.[4] 1249년에는 알가르베 지역을 점령하면서 무어인으로부터의 영토 회복을 완료했지만, 1411년 아이용 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이웃 카스티야 왕국의 위협을 받았다.[5]

유럽 국가 간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국가의 존립에 대한 위협에서 벗어나자 포르투갈은 해외, 특히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지역으로 관심을 돌렸다.[6] 마리니드 왕조(현재의 모로코)에 대한 첫 공격에는 여러 동기가 있었다.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 십자군을 계속할 기회를 제공했고, 군인들에게는 전장에서의 영광과 전리품을 약속했다.[7] 또한 포르투갈 무역을 확장하고 경제 침체를 해결할 기회이기도 했다.

1415년, 포르투갈은 지중해 연안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금과 노예 무역의 종착항 중 하나였던 세우타를 공격했다. 세우타 정복은 군사적으로 성공적이었고, 포르투갈이 이베리아 반도 밖으로 확장하는 첫걸음이 되었다.[8] 그러나 세우타는 곧 무슬림 세력의 포위 공격을 받아 방어에 많은 비용이 들었다. 포르투갈은 세우타를 내륙 확장의 기지로 사용할 수 없었고,[9] 사하라 횡단 대상들은 세우타를 우회하거나 다른 무슬림 항구를 이용했다.[10]

세우타 정복(1415년 8월 21일). 항해왕자 엔리케(1394–1460)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이 정복은 포르투갈 제국의 시작을 알렸다.


1434년, 항해왕자 엔리케의 선장 중 한 명인 질 이아느스가 보하도르 곶을 돌면서 그 너머에 대한 두려움을 잠재웠다. 이 심리적 장벽을 넘어서자 해안을 따라 더 깊이 탐험하기가 더 쉬워졌다.[15] 1443년, 엔리케의 형이자 당시 왕국의 섭정이었던 코임브라 공작 페드루는 엔리케에게 보하도르 곶 남쪽 땅의 항해, 전쟁, 무역 독점권을 부여했다. 이후 이 독점권은 교황령 ''둠 디베르사스''(1452)와 ''로마누스 폰티펙스''(1455)에 의해 강화되어 포르투갈에 새로 발견된 땅의 무역 독점권을 부여했다.[16] 15세기 중반에는 카라벨선이 도입되면서 탐험이 가속화되었다. 카라벨선은 당시 유럽의 다른 어떤 배보다도 바람을 더 잘 이용할 수 있었다.[17] 포르투갈 항해사들은 이 새로운 해양 기술을 사용하여 점점 더 남쪽으로 항해하여 연평균 1도씩 진출했다.[18] 1445년에는 세네갈과 카보베르데 반도에 도달했다.[19]

16세기 지도. 포르투갈의 기니 영유권과 엘미나 성을 보여줌


1445년, 모리타니아 해안의 아르긴 섬에 최초의 해외 페이토리아 무역 기지가 설립되어 무슬림 상인들을 유치하고 북아프리카 노선의 사업을 독점했다. 1446년, 알바루 페르난드스는 오늘날의 시에라리온까지 거의 진출했고, 1460년대에는 기니 만에 도달했다.[20] 카보베르데 제도는 1456년에 발견되어 1462년에 정착했다.

1455년부터 마데이라 제도에서 사탕수수 재배가 시작되어, 시칠리아의 고문과 제노바 공화국의 자본을 활용하여 유럽에서는 희귀했던 "달콤한 소금"을 생산했다. 알가르베에서 이미 재배되었지만, 마데이라의 접근성은 베네치아의 독점을 우회하려는 제노바와 플랑드르 상인들을 끌어들였다. 노예들이 사용되었고, 마데이라에서 수입된 노예의 비율은 16세기까지 전체 인구의 10%에 달했다.[21] 1480년까지 안트베르펜에는 마데이라 사탕무역에 종사하는 약 70척의 배가 있었고, 정제와 유통은 안트베르펜에 집중되었다. 1490년대가 되자 마데이라가 키프로스를 제치고 사탕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22] 바르톨로메오 마르키오니와 같은 사탕 상인들의 성공은 미래 여행에 대한 투자를 촉진시켰다.[23]

1469년, 항해왕자 엔리케가 사망하고 아프리카 탐험의 수익이 미미해지자,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는 기니 만 일부의 무역 독점권을 상인 페르낭 고메스에게 부여했다.[24] 5년 동안 매년 해안 약 160.93km를 탐험해야 했던 고메스는 상투메 프린시페를 포함한 기니 만의 섬들을 발견하고, 원주민과 아랍 및 베르베르 상인들이 방문하는 항구(당시 엘미나)에서 번성하는 충적층 금 무역을 발견하여 무역 기지를 설립했다.[25] 엘미나와 포르투갈 간의 무역은 10년 동안 증가했다.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 기간 동안, 대규모 카스티야 왕국 함대가 이 수익성 있는 무역을 장악하려고 시도했지만, 1478년 기니 해전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포르투갈의 독점적 통제가 확고히 자리 잡았다. 1481년, 즉위한 포르투갈의 주앙 2세는 이 무역의 보호를 보장하기 위해 상 조르제 다 미나 요새를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다시 왕실 독점으로 유지되었다. 1473년 페르낭 고메스의 후원을 받는 항해사들에 의해 적도가 횡단되었고, 1482년 디오구 강이 콩고 강을 횡단했다. 이 탐험 중에 포르투갈인들은 처음으로 콩고 왕국을 만났고, 곧 그들과 좋은 관계를 발전시켰다.[26] 1485~86년 탐험에서 강은 현재 나미비아에 있는 캡 크로스까지, 남회귀선 근처까지 계속 항해했다.[27]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그레이트 피시 강에 도달하여, 인도양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다는 프톨레마이오스 이후의 견해가 틀렸음을 증명했다. 동시에 육로로 비밀리에 여행하던 페루 다 코빌량은 에티오피아에 도착하여 인도로 가는 해상 루트가 곧 나타날 것임을 시사했다.[28]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해안선을 탐험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표시하기 위해 파드랑을 남겼다.[29] 그리고 요새와 무역 기지를 건설했다. 이 기지를 기반으로 그들은 노예와 금 무역에 수익성 있게 참여했다. 포르투갈은 1세기 이상 아프리카 해상 노예 무역을 사실상 독점하여 매년 약 800명의 노예를 수입했다. 대부분은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으로 끌려갔는데, 흑인 아프리카인들이 인구의 10%를 차지하게 된 것으로 추산된다.[30]

2. 2. 포르투갈 제국 (1415-1663)

1415년 북아프리카의 세우타 점령을 시작으로 포르투갈은 15세기16세기에 걸쳐 광대한 해외영토를 확보하며 제국으로 성장했다.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자오선은 포르투갈 왕국과 카스티야 왕관 사이에 세계를 분할했습니다.


바스쿠 다 가마(1469–1524)


카락선(carrack) 산타 카타리나 두 몬테 시나이(Santa Catarina do Monte Sinai)는 포르투갈 함대(Portuguese Armada)의 위력과 힘을 상징했습니다.


1415년 세우타를 점령하였으나, 기대와 달리 큰 이익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엔리케 항해왕의 주도로 대서양 연안 탐험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10][11] 1419년 마데이라 제도, 1427년 아소르스 제도에 도달하여 정착했으며, 이곳에서 생산된 밀은 포르투갈로 수출되었다.[13] 1444년에는 카보베르데, 베르데곶, 고레섬에 도달하였고,[10] 1480년에는 서아프리카 내륙 말리 제국팀북투까지 진출하였다.[10] 1482년에는 서아프리카 황금 해안요새를 건설하였고,[10]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희망봉을 돌아 항해하였다.[10] 1490년에는 앙골라 해안 루안다노예 무역 거점을 마련하였다.[10]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신대륙 발견 이후,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여 유럽을 제외한 세계를 스페인과 양분하였다.[31][32]

  • '''인도 항로 개척과 동방 진출'''


1498년 바스쿠 다 가마인도의 캘리컷(코지코드)에 도착하면서 인도 항로가 개척되었다.[37] 1500년에는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브라질에 표착하였으나,[38] 당시 포르투갈의 주요 관심은 인도에 집중되어 있었다.[39]

1505년 동아프리카소팔라와 키루와에 요새를 건설하고,[10] 1507년에는 모잠비크섬에 요새를 건설하였다.[10] 1508년 차울 해전에서 맘루크 왕조 함대에 패배하였으나,[10] 1509년 디우 해전에서 승리하여 인도양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10]

1510년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고아를 점령하고,[10] 1511년 믈라카를 점령하여 동남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10] 1513년에는 광저우에 도착하여 중국과의 교역을 시작하였고,[10] 1515년 호르무즈를 점령하여 페르시아만 지역의 영향력을 확대하였다.[10]

1543년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에 표착하면서 남만 무역이 시작되었고,[10] 1549년 프란시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도착하여 기독교를 전파하였다.[10] 1557년 으로부터 마카오 거주권을 획득하여 동아시아 무역의 거점으로 삼았다.[10]

  • '''스페인과의 갈등 및 네덜란드와의 경쟁'''


1578년 알카세르키비르 전투에서 세바스티앙 국왕이 전사하고, 1580년 포르투갈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펠리페 2세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10]

1602년부터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이 시작되어[10] 1630년 네덜란드가 브라질 북동부를 점령하였다.(~1654년)[10] 1639년 일본이 포르투갈 선박의 입항을 금지하고,[10] 1641년 네덜란드가 믈라카루안다를 점령하였다.[10]

1640년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으나,[10] 1648년 브라질 식민지군이 루안다를 탈환하고 앙골라 내륙으로 침공하였다.[10] 1658년에는 네덜란드에게 실론을 빼앗겼다.[10] 1661년 헤이그 강화 조약으로 네덜란드가 브라질 북동부와 앙골라에서 철수하였다.[10]

2. 3. 이베리아 연합, 프로테스탄트과의 경쟁 및 식민지 정체 (1580-1663)

1578년 모로코에서 벌어진 알카세르키비르 전투에서 세바스티앙 1세 국왕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했다. 1580년 스페인 왕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을 침공했고, 1581년 토마르 코르테스에서 포르투갈의 펠리페 1세로 즉위하여 두 왕국과 해외 제국을 스페인 합스부르크가 통치하의 왕조적 이베리아 연합으로 통합했다.[140]

토마르에서 펠리페 1세는 제국을 법적으로 별개로 유지하고, 리스본에 있는 포르투갈 총독이 그의 이익을 보도록 포르투갈 제국의 행정을 포르투갈인에게 맡기겠다고 약속했다.[141] 펠리페 1세는 심지어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에 수도를 2년 동안(1581~1583년) 리스본으로 옮기기도 했다.[142] 모든 포르투갈 식민지는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였지만, 아소르스 제도는 예외였다. 아소르스 제도는 브라질을 할양하겠다는 약속과 맞바꿔 프랑스의 카트린 드 메디치의 지지를 얻은 포르투갈 왕위 계승 경쟁자 크라토의 안토니오를 지지하며 저항했다. 스페인군은 결국 1583년에 이 섬들을 점령했다.[143]

남아메리카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통제 영역을 구분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경계는 그 이후로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 중심부로 넘어가면서 점점 무시되었고,[141] 이로 인해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탐험 임무는 정부의 명령을 받은 "엔트라다스"(진입)와 사적 주도로 이루어진 "반데이라스"(깃발)에 의해 "반데이란테"가 수행했다.[144] 이러한 탐험은 수년 동안 미지의 지역으로 모험을 떠났는데, 처음에는 원주민을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기 위해, 나중에는 금, 은, 다이아몬드 광산을 찾는 데 중점을 두었다.[145]

바이아 데 토두스 우스 산투스의 상 살바도르 탈환, 펠리페 3세네덜란드 공화국으로부터 탈환함


그러나 이 연합은 스페인이 자체 해외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갈등에 포르투갈을 끌어들였다는 것을 의미했다.[146] 주된 위협은 1568년부터 스페인에 대한 독립 투쟁을 벌여온 네덜란드로부터 왔다. 1581년 7주는 합스부르크 통치로부터 독립을 얻었고,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 선박과의 무역을 금지했는데, 브라질에서 설탕 생산 자금 조달에 많은 돈을 투자한 네덜란드도 포함되었다.[147]

스페인 제국 무역 네트워크는 이제 포르투갈 상인에게 개방되었는데, 이는 브라질보다 스페인 아메리카에서 더 높은 가격에 노예를 판매할 수 있었던 포르투갈 노예 상인에게 특히 유리했다.[148] 이렇게 새롭게 얻은 스페인 ''아시엔토''에 대한 접근 외에도 포르투갈은 페루와 멕시코의 은광 생산에 접근하여 금괴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149] 마닐라도 마카오-나가사키 무역 네트워크에 통합되어 포르투갈계 마카오인들이 필리핀 스페인인을 위한 무역 대리인으로 활동하고 아메리카의 스페인 은을 중국과의 무역에 사용할 수 있었고, 나중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경쟁하게 되었다.[150]

1592년 스페인과의 전쟁 중에 영국 함대는 아소르스 제도에서 인도와 중국에서 온 900톤의 상품을 싣고 있는 대형 포르투갈 카라크 마드레 데 데우스를 노획했다. 당시 상품의 가치는 50만파운드(당시 영국 국고의 거의 절반)로 추산되었다.[151] 이는 동방의 부에 대한 미리 맛보기였고 이 지역에 대한 영국의 관심을 고조시켰다.[152] 같은 해에 코르넬리스 드 하우트만은 네덜란드 상인들에 의해 리스본으로 보내져 향신료 제도에 대한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150][153]

요하네스 판 도테쿰이 1596년에 린쇼텐의 ''이티네라리오''에 실은 "고아 시장" 그림으로 1580년대 포르투갈 고아의 주요 거리를 보여줍니다.


네덜란드는 결국 아시아에서 포르투갈 제국을 와해하는 데 고아의 중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1583년 상인이자 탐험가였던 얀 후이헌 판 린쇼텐(1563년– 1611년 2월 8일)은 전에 고아 대주교의 네덜란드 비서로 일하면서 동인도와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전역의 비밀 포르투갈 무역로의 위치를 포함한 정보를 얻었다. 이것은 1595년에 출판되었고, 다음 해에 그의 ''이티네라리오''로 크게 확장되었다.[154][155] 네덜란드와 영국의 이익은 이 새로운 정보를 사용하여 1600년 영국 동인도 회사와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설립을 포함한 상업적 확장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발전은 특허 회사가 동인도에 진출할 수 있게 했다.[156][157]

과라라페스 제2전투에서 포르투갈의 승리는 페르남부쿠의 네덜란드 세력을 종식시켰습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를 공격하고 60년 이상 지속될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을 시작하면서 해외로 싸움을 옮겼다(1602-1663). 프로테스탄트 영국과 같은 다른 유럽 국가들은 이 전쟁에서 네덜란드 제국을 지원했다. 네덜란드는 다양한 원주민 동맹국의 지원을 받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결국 말라카, 실론, 상 조르제 다 미나를 장악했다. 네덜란드는 또한 수익성이 높은 설탕 생산 지역인 브라질 북동부루안다를 지역적으로 통제했지만, 포르투갈은 상당한 투쟁 끝에 이 지역들을 되찾았다.[158][159]

한편 페르시아만 지역에서는 포르투갈이 1622년 사파비 왕조와 영국의 연합군에 의해 호르무즈를 잃었고, 알 야아룹 통치하의 오만은 1650년에 무스카트를 점령했다.[160] 1625년 호르무즈 해전은 포르투갈-사파비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으며 무승부로 끝났다.[161] 그들은 인도양 내에서 반복적인 침입을 위한 기지로 무스카트를 계속 사용했으며, 1698년 포르투갈 요새를 점령하기도 했다.[162] 1630년대 에티오피아와 일본에서 지역 지도자들에 의한 선교사들의 축출은 각 지역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163][164]

2. 4. 포르투갈 제국 (1663-1822)

1640년 주앙 4세가 포르투갈 국왕으로 선포되면서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1643년에는 북아프리카, 마데이라 제도, 아소르스 제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포르투갈 해외 제국을 통치하는 해외 평의회가 설립되었다.[165] 17세기 저명한 인물로는 살바도르 드 사가 있었다.[166]

1661년 포르투갈은 잉글랜드에 봄베이와 탕헤르를 지참금으로 제공했고, 이후 100년 동안 잉글랜드는 점차 인도에서 가장 지배적인 무역국이 되었다. 1668년 스페인은 이베리아 동군 연합의 종식을 인정했고, 포르투갈은 그 대가로 세우타를 스페인에 할양했다.[167]

포르투갈이 마라타 제국의 침나지 아파[168][169]와 켈라디 나야카 왕국의 시바파 나야카[170]에게 패배하고 네덜란드와의 충돌이 끝난 후, 고아와 인도의 몇몇 작은 기지에만 매달릴 수 있었고 브라질아프리카의 영토를 되찾았지만,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무역 기지들을 통해 무역이 전환되면서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잃었다. 1787년 고아에서는 핀토의 음모 혹은 핀토 반란이 발생했는데, 이것은 포르투갈 지배에 대한 반란이었다.[171]

18세기 동안 브라질브라질나무와 설탕을 수출하는 제국에서 점점 더 중요해졌다.[145] 1693년 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주에서 금이 발견되었다. 미나스제라이스주, 마투그로수주, 고이아스주에서의 대규모 금 발견과 이후 다이아몬드 발견은 "브라질 골드러시"로 이어졌다.[173] 마을은 급속한 정착과 함께 제국의 새로운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광산 호황의 정점이었던 1739년, 미나스제라이스주의 인구는 20만 명에서 25만 명 사이였다.[174]

1817년 아메리카 대륙의 포르투갈 제국 속주들


골드러시는 포르투갈 왕실의 수입을 상당히 증가시켰다. 왕실은 채굴된 모든 광석의 5분의 1, 즉 "5분의 1세"를 부과했다. 1718년 상파울루미나스제라이스주는 두 개의 주장직이 되었고, 후자에는 8개의 '빌라'가 만들어졌다.[175][176] 왕실은 또한 자체 관할 구역 내에서의 다이아몬드 채굴을 제한했다.[176] 금이 세계 무역을 증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동안 브라질의 주요 수출품은 농장 산업이 되었으며, 1760년 수출의 50%(금은 46%)가 설탕이었다.[174]

아프리카인들은 미나스제라이스주에서 가장 큰 인구 집단이 되었다. 광산업에 종사하는 노예들과 관련된 높은 사망률에도 불구하고, 노예 해방의 가능성이 생겼다.[177]

1755년 리스본은 리스본 대지진을 겪었으며, 이어진 쓰나미로 27만 명의 인구 중 4만 명에서 6만 명이 사망했다.[179] 이는 18세기 후반 포르투갈의 식민지 야망을 크게 저해했다.[180]

경제사학자들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식민 무역은 1500년에서 1800년 사이 포르투갈 경제 성장에 상당한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181]

17세기부터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영국도 대양으로 진출하여 포르투갈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금교와 쇄국도 개신교 국가 네덜란드의 반포르투갈 음모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229] 이 때문에 17세기 후반 이후 포르투갈의 아시아 무역은 쇠퇴했지만, 남아메리카 대륙 브라질 식민에 힘을 쏟았고, 18세기에 브라질에서 금이 풍부하게 생산되면서 포르투갈은 다시 황금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1703년 영국과 맺은 메슈엔 조약은 결과적으로 금의 유출을 초래했고, 포르투갈 본국은 그다지 경제적인 이익을 얻지 못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브라질의 금 생산도 감소했고, 브라질 식민지 자체가 브라질 제국으로 독립을 달성하여 포르투갈로부터 분리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영국 제국이 세계의 바다에 패권을 주장했고, 포르투갈에는 앙골라, 모잠비크 등의 아프리카 식민지와 인도고아(Goa), 디우(Diu), 마카오(Macau), 티모르(Timor) 등 옛 시대의 유물이라고 할 만한 것만 남게 되었다.

이러한 식민지들도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60년대에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최종적으로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을 계기로 포르투갈은 이들 식민지의 독립을 승인했다.

2. 5. 브라질 독립 (1822)



180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포르투갈을 침략하자, 마리아 1세 여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행하던 주앙 6세는 왕실을 브라질로 이주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1815년, 브라질은 왕국으로 승격되었고, 포르투갈 국가는 공식적으로 포르투갈, 브라질 및 알가르베스 연합 왕국(''Reino Unido de Portugal, Brasil e Algarves'')이 되었으며, 수도는 리스본에서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겨졌다. 이는 유럽 국가가 식민지 중 하나에서 통치된 유일한 사례이다. 1820년 자유주의 혁명 이후 리스본에 소집된 코르테스 헌법 재판소(Portuguese Constitutional Courts)에는 브라질 대표도 선출되었다.[192]

1821년 왕족이 포르투갈로 돌아왔지만, 그 사이 브라질인들 사이에서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1822년, 주앙 6세의 아들인 섭정 왕자 페드루 1세는 1822년 9월 7일 브라질의 독립을 선포하고 새로운 브라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남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와 달리 브라질의 독립은 큰 유혈 사태 없이 이루어졌다.[193][194]

2. 6. 제3제국 (1822-1999)

브라질1822년 브라질 제국으로 독립하면서, 포르투갈 제국은 세 번째 시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 포르투갈은 남아메리카의 영토 대부분과 아시아의 일부 거점만을 보유하게 되었다. 19세기 유럽의 식민주의가 절정에 달했을 때, 포르투갈은 다른 유럽 열강과의 경쟁을 위해 아프리카의 전초 기지를 국가 규모의 영토로 확장하는 데 집중했다.

19세기, 포르투갈은 포르투갈 아프리카를 확고히 하기 위한 원정을 시작했습니다.


포르투갈은 앙골라모잠비크 내륙으로 진출했고, 탐험가 세르파 핀토, 에르메네질도 카펠로, 로베르토 이벤스는 아프리카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한 최초의 유럽인들 중 한 명이었다.[195][196] 두 식민지를 연결하려는 계획인 분홍 지도는 1880년대 포르투갈 정책의 주요 목표였다.[197] 그러나 카이로에서 케이프타운까지 영토를 확보하려던 영국에게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었다. 1890년 영국 최후통첩은 포르투갈의 카를루스 1세에 의해 마지못해 수용되었고, 분홍 지도는 끝을 맞이했다.[197]

카를루스 1세의 최후통첩에 대한 반응은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이용되었다.[197] 1908년 2월 1일, 카를루스 1세 국왕과 루이스 필리페 왕세자는 리스본에서 두 명의 포르투갈 공화주의 혁명가인 알프레도 루이스 다 코스타와 마누엘 부이사에 의해 암살당했다. 루이스 필리페의 동생인 마누엘이 포르투갈의 마누엘 2세 국왕이 되었다. 2년 후인 1910년 10월 5일, 그는 퇴위당해 런던 근처 트위켄햄의 풀웰 파크에 있는 영국으로 망명했고, 포르투갈은 공화국이 되었다.[198]

1914년, 독일 제국은 포르투갈의 통제하에 있는 앙골라를 탈취할 계획을 세웠다.[199] 포르투갈과 독일 군인 간의 소규모 충돌이 발생하여 본토에서 증원군이 파견되었다.[200] 이 군인들의 주요 목표는 모잠비크 북부에 있는 키온가 삼각지대(Kionga Triangle)를 탈환하는 것이었는데, 이 지역은 이미 독일의 지배하에 있었다.

1916년, 포르투갈이 리스본에 있는 독일 선박들을 억류하자 독일은 포르투갈에 선전포고를 했다. 포르투갈도 마찬가지로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201] 전쟁 초반, 포르투갈은 주로 프랑스에 주둔한 연합군에 물자를 공급하는 데 참여했다. 1916년에는 마데이라에서 포르투갈 영토에 대한 공격이 한 번 있었다.[202]

1917년, 포르투갈은 프랑스 연합군 전선에 병력을 파견했다. 같은 해 중반, 포르투갈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첫 번째 사상자를 기록했다. 포르투갈 아프리카에서는 포르투갈과 영국이 모잠비크와 앙골라 모두에서 독일군과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 같은 해 후반, U보트가 다시 포르투갈 해역에 진입하여 마데이라를 다시 공격하여 여러 포르투갈 선박을 침몰시켰다. 1918년 초까지 포르투갈은 릴 전투에 참여하는 등 독일과 연합군 전선에서 계속 싸웠다.[204] 가을이 다가오자 독일은 포르투갈 아프리카와 포르투갈 선박에 대해 성공을 거두며 여러 척의 선박을 침몰시켰다. (포르투갈 관점에서) 거의 3년간의 전투 끝에 독일이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포르투갈은 잃어버린 모든 영토를 되찾았지만, 전쟁 중 획득한 영토(키온가(Kionga) 제외)는 현존 상태 유지 원칙에 따라 소유권을 유지하지 못했다. 키온가는 오늘날 탄자니아에 있는 항구 도시이다.[205]

1960년대에는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인도의 식민지는 1961년 인도군의 무력 침공으로 정복되었다. 최종적으로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을 계기로 포르투갈은 식민지들의 독립을 승인했다. 1975년에는 아프리카 식민지들과 포르투갈령 티모르가 독립했다. 1976년 인도네시아동티모르를 병합했지만, 1999년 마카오중국에 반환되면서 포르투갈 식민 제국은 사실상 소멸했다. 2002년 포르투갈은 동티모르의 독립을 승인하면서 식민 제국은 완전히 소멸했다.

2. 7. 탈식민지화와 쇠퇴 (1954-1999)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 열강의 제국들에서 탈식민지화 운동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이어진 냉전은 미국과 소련이 영향력 확대를 위해 경쟁하면서 포르투갈의 해외 인구 사이에 불안정을 야기했다. 1947년 영국이 인도에 독립을 부여하고 프랑스가 인도의 프랑스령 점유지를 새롭게 독립한 국가에 편입시키기로 결정함에 따라 포르투갈에도 같은 조치를 취하라는 압력이 가해졌다.[207] 1933년 집권한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는 이러한 압력에 저항하였다. 살라자르는 1950년 인도 총리 자와할랄 네루의 점유지 반환 요청을 거부하고 이들을 포르투갈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간주했다.[208] 다음 해 포르투갈 헌법이 개정되어 식민지의 지위가 해외 속령으로 변경되었다. 1954년 현지 봉기로 인해 인도의 다드라와 나가르 하벨리 점유지에서 포르투갈 당국이 전복되었다. 인도에 남아 있는 포르투갈 식민지의 존재는 점점 더 견딜 수 없게 되었고, 네루는 거의 모든 인도 국내 정당과 소련 및 동맹국의 지지를 받았다. 1961년 앙골라에서 포르투갈에 대한 봉기 직후 네루는 인도군을 고아, 다만과 디우에 파병했고, 이 지역들은 빠르게 점령되어 다음 해 공식적으로 합병되었다. 살라자르는 단순히 점령되었다고 생각하며 주권 이양을 인정하지 않았다. 고아 지방은 1974년까지 포르투갈 국회에 계속 대표되었다.[209]

1961년 2월 앙골라에서 폭력이 발생한 것은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제국이 끝나는 시작이었다. 앙골라의 포르투갈군 장교들은 게릴라전의 발발에 군사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 운동과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살라자르는 제국을 온전하게 유지하겠다는 결의를 공개적으로 밝혔고, 연말까지 5만 명의 군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같은 해, 서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잔재인 위다의 작은 포르투갈 요새 상 주앙 바티스타 드 아주다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다호메이(현 베냉)의 새로운 정부에 의해 합병되었다. 불안은 앙골라에서 기니(1963년 반란)와 모잠비크(1964년)로 확산되었다.[209]

무장 세력 운동(MFA)의 군부와 노동 계급 사이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영토 중 일부에서 등장하는 민족주의 게릴라 운동에 저항한 포르투갈 식민 전쟁(1961~1974)의 비용과 인기 부족은 결국 1974년 에스타두 노부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다. "카네이션 혁명"으로 알려진 이 사건 이후 집권한 MFA 주도 정부 – 국가 구원 군사위원회 – 의 최초 조치 중 하나는 전쟁을 종식하고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포르투갈의 철수를 협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포르투갈 시민들의 포르투갈 아프리카 영토(주로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의 대규모 탈출을 초래하여 100만 명이 넘는 포르투갈 난민 – ''레토르나도스'' – 를 만들어냈다.[211] 포르투갈의 새로운 통치 당국은 또한 인도 군대가 침략한 고아와 기타 포르투갈령 인도 영토를 인도 영토로 인정했다. 베냉의 상 주앙 바티스타 드 아주다에 대한 주장은 1974년 포르투갈에 의해 수용되었다.[212]

앙골라모잠비크에서 곧바로 내전이 발발하여, 전직 반군이 구성한 신생 공산 정부(소련, 쿠바, 기타 공산 국가의 지원을 받음)가 자이르, 남아프리카 공화국, 미국과 같은 국가의 지원을 받는 반군 세력과 싸웠다.[213] 동티모르도 1975년 독립을 선포하여 많은 포르투갈 난민들이 포르투갈로 탈출했는데, 이들은 ''레토르나도스''로 알려졌다. 그러나 동티모르는 거의 즉시 인도네시아에 의해 침공되어 나중에 점령되어 1999년까지 지속되었다. 유엔 주도 국민투표 결과 동티모르인 대다수가 독립을 선택하여 2002년에 최종적으로 독립을 쟁취했다.[214]

1987년 포르투갈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포르투갈 합동 선언에 서명하여 마지막 남은 해외 영토인 마카오의 주권 이양 절차와 조건을 확립했다. 이 과정은 2년 전 홍콩에 관한 영국과 중국의 합의와 유사했지만, 포르투갈의 중국으로의 이양은 홍콩에 관한 영국의 것보다 저항이 적었다. 포르투갈은 이미 1979년에 마카오를 포르투갈 행정 하의 중국 영토로 인정했기 때문이다.[215] 이양 협정에 따라 마카오는 일국 양제 정책에 따라 통치되며, 이양 후 최소 50년(2049년까지) 동안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유지하고 자본주의적 생활 방식을 유지한다. 1999년 12월 20일 마카오 반환은 공식적으로 포르투갈 제국의 종말과 아시아의 식민주의 종식을 알렸다.[216]

3. 포르투갈 제국의 지배 영토

다음은 포르투갈 제국이 통치했던 대표적인 식민지 영토이다.



포르투갈 제국은 페르시아만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아주란 제국과 오스만 제국과 향신료 무역의 지배권을 다투었다. 1515년 아폰수 드 알부케르케는 페르시아만 입구에 위치한 호르무즈를 정복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1521년 안토니오 코레이아가 이끄는 군대가 바레인을 점령했다.[84] 이후 포르투갈은 100년 동안 페르시아만 남부 대부분을 지배했다.

1534년 구자라트는 무굴 제국의 공격을 받았다. 술탄 구자라트의 바하두르 샤는 포르투갈과 바세인 조약을 체결하여 다만, 디우, 뭄바이, 바세인을 포르투갈에 할양했다.[86] 무굴 제국의 후마윤이 바하두르를 상대로 승리한 후, 바하두르는 조항을 확인하기 위해 포르투갈과 조약을 체결하고 디우에 요새를 건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자라트는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어 디우의 지배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1538년과 1546년의 두 차례 포위 공격 실패로 포르투갈의 패권이 확립되었다.[86][87]

4. 통치 체제

리스본에서 포르투갈의 카라벨선이 화물을 하역하는 모습. 테오도르 드 브리(Theodor de Bry)의 1593년 판화(후에 채색됨)


포르투갈은 1520년 로드리고 드 리마(Rodrigo de Lima)가 이끄는 에티오피아(아비시니아) 왕국과 접촉했다.[91][92] 이는 포르투갈이 프레스터 존을 찾던 시기와 일치하며, 곧 이 왕국을 프레스터 존의 땅으로 여기게 되었다.[93] 포르투갈과 에티오피아는 오스만 제국의 진격에 대한 두려움으로 동맹을 맺었다.[91][94] 1529년 아달 술탄국이 심브라 쿠레 전투에서 에티오피아를 패배시키고 이슬람 세력이 확장되자, 포르투갈은 군인과 소총으로 겔라우데우스(Gelawdewos) 왕을 지원했다. 오스만 제국도 아달 술탄국에 군인과 소총을 지원했지만, 1543년 와이나 데가 전투에서 아달 술탄 아마드 이븐 이브라힘 알가지(Ahmad ibn Ibrahim al-Ghazi)가 사망한 후 아달-오스만 연합군은 후퇴했다.[95][96][97]

포르투갈은 1520년 콩고 왕국의 속국인 응동고(Ndongo)와도 접촉했다.[98] 콩고의 왕 아폰소 1세는 이 과정에 개입했고, 응동고가 포르투갈 선교단을 체포한 후 응동고에 콩고 사절단을 파견했다.[98] 응동고와의 노예 무역 증가는 콩고와 포르투갈 간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상투메(São Tomé)의 포르투갈 대사들은 콩고 왕국에 대항하여 응동고를 지원하기도 했다.[99][100] 1568년 자자가 콩고 지역을 정복했을 때, 포르투갈은 콩고를 지원했다.[101] 콩고는 루안다 섬의 식민화를 허용했고, 루안다는 파울로 디아스 드 노바이스(Paulo Dias de Novais)에 의해 1576년에 건설되어 노예 무역항이 되었다.[101][102] 드 노바이스(De Novais)와 응동고의 동맹은 왕실의 영향력에 분개한 루소-아프리카인들을 화나게 했다.[103] 1579년, 응동고의 통치자 응골라 킬루안제 키아 난디(Ngola Kiluanje kia Ndamdi)는 포르투갈 망명자들의 영향 아래 응동고의 수도 카바사(Kabasa)에서 포르투갈과 콩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포르투갈과 콩고는 응동고에 맞서 싸웠고, 응동고와 포르투갈 사이의 전쟁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다.[104]

동아프리카에서는 모잠비크가 될 지역을 탐험하고 정착한 포르투갈 왕실을 대신하여 활동하는 주요 대리인은 ''prazeirospt''였다. 이들은 잠베지 강 주변의 광대한 영지를 왕으로부터 임대받았다. 치쿤다(chikunda) 전사 노예들의 거대한 군대를 지휘하는 이들은 봉건 영주처럼 행동하며 현지 추장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고, 영지를 방어하며, 상아나 노예 무역에 참여하거나, 무타파 왕국의 정치에 개입하여 꼭두각시 왕을 세우기도 했다.

5. 무역 체제

1542년,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포르투갈의 주앙 3세의 명으로 사도좌 대사관을 맡아 고아에 도착했다. 같은 시기 프란시스쿠 제이모토, 안토니오 모타 등의 상인들이 처음으로 일본에 도착했다. 페르낭두 멘데스 핀투에 따르면, 그들은 다네가시마에 도착했고, 현지인들은 조총에 깊은 인상을 받아 곧바로 대량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105] 1570년까지 포르투갈은 일본 항구 일부를 매입하여 나가사키시의 일부를 건설했고,[106] 이곳은 중국과 유럽과의 삼각 무역에서 주요 무역항이 되었다.[107]

유럽과 아시아 경쟁자들로부터 무역을 보호하며 포르투갈은 아시아와 유럽 간의 무역뿐만 아니라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 일본과 같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지역 간의 무역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포르투갈인들을 따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가톨릭교[108][109]를 전파했다.[110]

1488년 아프리카 대륙 남단에 도달한 포르투갈은 동양의 향신료 무역 독점과 기독교 전파를 목적으로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연안 각지에 거점을 구축하고 무슬림과 싸워 인도양패권을 장악했다. 이 때문에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등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향신료를 조달하여 유럽에서의 공급을 독점하고 있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포르투갈은 더 나아가 말레이 반도에서 향신료 무역의 중요한 중계지였던 말라카를 점령한 이후, 동남아시아동아시아에까지 무역망을 확장하여 세계적인 교역 시스템을 구축했다.

포르투갈의 동인도 무역은 명목상으로는 모두 포르투갈 왕실의 사업이었지만, 인구와 왕실 재정 규모로는 단독으로 인력과 선박을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탈리아계나 독일계의 금융 지원을 받아 추진되었다. 16세기 후반부터는 제노바 공화국의 산조르조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았다. 리스크 관리를 위해 여러 사람이 공동 출자하는 콤파니아나 고리의 해상 대부인 리스폰덴시아가 이루어졌다.

당시 포르투갈의 무역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번호구분내용
1왕실 사업희망봉을 통과하여 포르투갈과 인도양을 잇는 무역 (왕실과 계약을 맺은 선박 사용)
2왕실 허가 무역명나라 시대 중국, 일본, 태국(샴), 벵골, 코로만델 등에서 이루어졌으며, 무역권은 매각되어 개인 무역에도 사용됨.
3비공식 사적 무역공식적인 무역에는 왕실 또는 왕실의 허가가 필요했지만, 불법적인 무역을 시작하는 자들도 많았음. 포르투갈인 중에는 현지 상인과 협력하여 무역을 하거나, 해적 행위를 하는 자들도 있었음.
4카르타스 이용 무역고아 부왕이나 각지의 카피탕이 통행증으로 카르타스(免許状)를 발행, 선장 이름, 선박 정보, 승무원 정보를 기록. 카르타스를 가진 선박은 안전이 보장되는 대신, 포르투갈 요새에 기항하고 세금을 납부할 의무가 있었음.


6. 유산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CPLP)는 포르투갈 제국의 문화적 및 정부 간 후계자 역할을 한다.[217]

마카오는 1999년 12월 20일 중화인민공화국과 포르투갈 간의 협정에 따라 중국에 반환되었지만, 포르투갈어는 광둥어와 함께 마카오의 공용어로 남아 있다.[218]

아소르스 제도마데이라 제도(살바헤스 제도 포함)는 현재 포르투갈과 정치적으로 연결된 유일한 해외 영토이다. 포르투갈은 1975년에 동티모르의 식민지 해체 과정을 시작했지만, 1999년부터 2002년까지는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이 포르투갈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때때로 포르투갈의 마지막 남은 식민지로 여겨지기도 했다.[219]

포르투갈의 옛 식민지 8개국은 공용어로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며, 이들 국가와 포르투갈은 현재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 회원국이다. 이들의 총 면적은 10742000km2로 지구 육지 면적의 7.2%를 차지한다.[220] 2023년 현재 CPLP에는 32개의 준회원국이 있으며, 이는 포르투갈의 옛 제국의 세계적인 영향력을 반영한다. 또한 12개의 후보국 또는 지역이 CPLP 회원 가입을 신청하여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221]

오늘날 포르투갈어는 세계 주요 언어 중 하나이며, 전 세계적으로 약 2억 4천만 명의 화자가 있는 세계 6위의 언어이다.[222] 브라질 덕분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세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이지만, 캐나다, 미국, 베네수엘라와 같은 국가에도 상당한 루소폰 공동체가 있다. 또한 크리스탕 사람들이 말라카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포함하여 수많은 포르투갈어 기반 크리올어가 있다.[223]

포르투갈 상인들이 유럽에 감귤류를 처음으로 소개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여러 현대 인도유럽어족에서는 이 과일의 이름이 포르투갈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예를 들어 알바니아어 portokall, 불가리아어 портокал (''portokal''), 그리스어 πορτοκάλι (''portokali''), 마케도니아어 портокал (''portokal''), 페르시아어 پرتقال (''porteghal''), 루마니아어 portocală 등이 있다.[224][225] 아랍어 البرتقال (''bourtouqal''), 조지아어 ფორთოხალი (''p'ort'oxali''), 터키어 portakal 및 암하라어 ''birtukan''과 같이 다른 언어에서도 관련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224] 또한 남부 이탈리아 방언(예: 나폴리어)에서는 오렌지를 portogallo 또는 purtuallo라고 하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포르투갈)식"을 의미하며, 이탈리아어의 ''arancia''와는 대조적이다.

국제적인 중요성을 고려하여 포르투갈과 브라질은 포르투갈어를 유엔의 공용어 중 하나로 포함시키기 위한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226]

리스본의 항해의 기념비


카보베르데 산티아구 섬의 상 필리페 왕립 요새

참조

[1] 논문
[2] 논문
[3] 논문
[4] 논문
[5] 논문
[6] 논문
[7] 논문
[8] 논문
[9] 논문
[10] 논문
[11] 논문
[12] 논문
[13] 논문
[14] 서적 The World since 1500: a Global history
[15] 논문
[16] 논문
[17] 논문
[18] 논문
[19] 논문
[20] 논문
[21] 서적 Os Descobrimentos e a Economia Mundial Arcádia
[22] 논문
[23] 논문
[24] 논문
[25] 논문
[26] 논문
[27] 논문
[28] 논문
[29] 논문
[30] 논문
[31] 논문
[32] 논문
[33] 논문
[34] 논문
[35] 논문
[36] 논문
[37] 서적
[38] 논문
[39] 논문
[40] 논문
[41] 웹사이트 Thangasseri, Kollam, Dutch Quilon, Kerala https://www.keralato[...] 2014-09-01
[42] 논문
[43] 논문
[44] 논문
[45] 논문
[46] 논문
[47] 논문
[48] 논문
[49] 논문
[50] 논문
[51] 논문
[52] 논문
[53] 논문
[54] 논문
[55] 논문
[56] 논문
[57] 논문
[58] 논문
[59] 논문
[60] 논문
[61] 논문
[62] 논문
[63] 서적 Encyclopedia of the Peoples of Asia and Oceania Infobase Publishing
[64]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Discovery and Exploration of the Pacific Islands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65] 서적
[66] 서적 The First Firangis https://books.google[...] Aleph Book Company
[67] 서적
[68]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Cambridge University Press
[69] 서적 China and Europe Since 1978: A European Perspectiv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09-01
[70] 서적 The Grove Encyclopedia of Materials and Techniques in Art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71] 서적 The Biography of Tea https://books.google[...] Crabtree Publishing Company
[72] 서적 Hong Kong & Macau Lonely Planet
[73] 서적 Hong Kong & Macau Rough Guides
[74] 웹사이트 Tne Portuguese in the Far East http://algarvedailyn[...] Algarvedailynews.com 2013-04-18
[75] 웹사이트 'Portugal's Discovery in China' on Display http://www.china.org[...] 2013-05-03
[76]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2; Volume 8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77] 웹사이트 When Portugal Ruled the Seas | History & Archaeology | Smithsonian Magazine http://www.smithsoni[...] Smithsonianmag.com 2013-04-18
[78] harvnb
[79] harvnb
[80] harvnb
[81] harvnb
[82] 서적 Interracial Intimacy in Japan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83] harvnb
[84] 서적 Sacred Space and Holy War IB Tauris
[85] harvnb
[86] harvnb
[87] harvnb
[88] harvnb
[89] 서적 A Military History of the Ottomans: From Osman to Atatürk https://books.google[...] ABC-CLIO
[90] 웹사이트 The Voyage of Don Stefano de Gama from Goa to Suez, in 1540, with the intention of Burning the Turkish Galleys at that port http://www.columbia.[...]
[91] harvnb
[92] harvnb
[93] harvnb
[94] harvnb
[95] harvnb
[96] harvnb
[97] harvnb
[98] harvnb
[99] harvnb
[100] harvnb
[101] harvnb
[102] harvnb
[103] harvnb
[104] harvnb
[105] 서적 Technology in World Civilization: A Thousand-year History https://archive.org/[...] MIT Press
[106] 서적 The Economic Aspects of the History of the Civilization of Japan
[107] harvnb
[108] 서적 Possessed by the Virgin: Hinduism, Roman Catholicism, and Marian Possession in South India Oxford University Press
[109] 서적 American History from a Global Perspective: An Interpretation Greenwood Publishing Group
[110] harvnb
[111] harvnb
[112] harvnb
[113] harvnb
[114] harvnb
[115] harvnb
[116] harvnb
[117] harvnb
[118] harvnb
[119] harvnb
[120] harvnb
[121] harvnb
[122] harvnb
[123] 웹사이트 Chapters of Brazil's Colonial History 1500–1800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2-07-10
[124] harvnb
[125] harvnb
[126] harvnb
[127] harvnb
[128] harvnb
[129] harvnb
[130] harvnb
[131] harvnb
[132] harvnb
[133] harvnb
[134] harvnb
[135] harvnb
[136] harvnb
[137] harvnb
[138] harvnb
[139] harvnb
[140] harvnb
[141] 논문
[142] 논문
[143] 논문
[144] 논문
[145] 논문
[146] 논문
[147] 논문
[148] 논문
[149] 논문
[150] 논문
[151] 웹사이트 Early Modern Ship-types, 1450–1650 https://web.archive.[...] The Newberry Library 2009-05-08
[152] 학술지 The Presence of the "Portugals" in Macau and Japan in Richard Hakluyt's ''Navigations'' https://redalyc.org/[...] 2022-03-26
[153] 논문
[154] 서적 Itinerario, Voyage ofte Schipvaert https://archive.org/[...] Cornelis Claesz. 1596
[155] 서적 The Voyage of John Huyghen van Linschoten to the East Indies... https://archive.org/[...] Hakluyt Society 1885
[156] 서적 The Epic of Latin America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2-07-10
[157] 서적 The Worlds of the East India Company https://books.google[...] Boydell & Brewer 2012-07-10
[158] 논문
[159] 서적 The Dutch in Brazil, 1624–1654 Clarendon Press
[160] 논문
[161] 서적 Dutch Relations with the Persian Gulf Palgrave Macmillan
[162] 논문
[163]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European Imperialism https://books.google[...] Greenwood Press 2017-08-27
[164] 서적 Japan and the Dutch 1600-1853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7-08-27
[165] 서적 Overseas Council (Portugal) Charles Scribner's Sons
[166] 서적 Salvador Correia de Sá e Benavides Charles A. Scribner's Sons
[167] 서적 Early Modern Spain: A Documentary Histor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12-07-10
[168] 서적 History of the Konkan
[169] 논문
[170] 간행물 Portuguese Studies Review Baywolf Press
[171] 웹사이트 Cm Places Wreath at Pinto's Revolt Memorial https://goemkarponn.[...] 2022-12-13
[172] 뉴스 'Pinto Revolt' murals to adorn Candolim road https://timesofindia[...] 2016-12-23
[173] 논문
[174] 논문
[175] 논문
[176] harvard
[177] harvard
[178] harvard
[179] harvard
[180] 서적 Geomatics in Tsunami https://books.google[...] New India Publishing 2012-07-10
[181] 학술지 The great escape? The contribution of the empire to Portugal's economic growth, 1500–1800 2015
[182] harvard
[183] harvard
[184] harvard
[185] 서적
[186] harvard
[187] harvard
[188] 서적
[189] harvard
[190] 서적
[191] 서적
[192] harvard
[193] 서적 History of England: From the Roman Invasion to the Accession of Queen Victoria I https://archive.org/[...] 2012-07-10
[194] 서적 The History of Brazil https://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2012-07-10
[195] harvard
[196] harvard
[197] harvard
[198] harvard
[199] 학술지 The Anglo-German Negotiations over the Portuguese Colonies in Africa, 1911–14 1974-09
[200] 뉴스 Portugal enters the war https://archive.org/[...] 1914-10-26
[201] harvard
[202] ship
[203] 웹사이트 Portuguese Fireplace http://www.newforest[...] Newforestexplorersguide.co.uk 2014-08-06
[204] 웹사이트 Battle of La Lys http://www.worldwar1[...]
[205] 간행물 The Kionga Triangle
[206] 서적 Paradigm Shift in Language Planning and Policy: Game-Theoretic Solutions https://books.google[...] Walter de Gruyter, Inc. 2012-07-12
[207] 참고자료
[208] 참고자료
[209] harvard
[210] 서적 Oxford Research Encyclopedia of African History 2017-05-24
[211] 뉴스 Dismantling the Portuguese Empire https://web.archive.[...] Time Magazine 1975-07-07
[212] 웹사이트 The Geographical Oddity of Fortaleza de Sao Joao Baptista de Ajuda https://www.geograph[...] 2012-07-08
[213] 논문 (정보 부족) 2012
[214] 뉴스 East Timor: Birth of a nation http://news.bbc.co.u[...] 2012-07-12
[215] 웹사이트 Joint declaration of the Govern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and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Portugal on the question of Macao http://bo.io.gov.mo/[...] Government Printing Bureau (Macao SAR) 1987
[216] 뉴스 Macau and the end of empire http://news.bbc.co.u[...] BBC News 1999-12-18
[217] 웹사이트 CPLP Histórico – Como surgiu? http://www.cplp.org/[...] CPLP 2015-12-16
[218] 웹사이트 Cataloging Policy and Support Office: Macau https://www.loc.gov/[...] 2012-07-12
[219] 서적 (정보 부족)
[220] 웹사이트 CPLP http://www.cplp.org/[...] 2010-08-12
[221] 위키 CPLP :pt:CPLP
[222] 웹사이트 língua portuguesa https://web.archive.[...] 2010-08-12
[223] 서적 (정보 부족)
[224] 웹사이트 Multilingual Multiscript Plant Name Database: Sorting Citrus Names http://www.plantname[...] University of Melbourne 2012-12-11
[225] 서적 The Europeans: A Geography of People, Culture, and Environment https://books.google[...] Guilford Press
[226] 웹사이트 ONU: Petição para tornar português língua oficial https://web.archive.[...] Diario.iol.pt 2005-11-17
[227] 서적 Possessed by the Virgin: Hinduism, Roman Catholicism, and Marian Possession in South India Oxford University Press
[228] 서적 American History from a Global Perspective: An Interpretation Greenwood Publishing Group
[229] 일반
[230] 뉴스 (정보 부족) Far Eastern Economic Review 1974
[231] 서적 The Evolution of Portuguese - Chinese Relations and the Question of Macao from 1949 to 1968 Chinese Academy of Social Sciences
[232] 웹사이트 디우 https://web.archive.[...] 세계飛び地領土研究会
[233] 웹사이트 다드라&나갈하벨리 http://www.geocities[...] 세계飛び地領土研究会
[234] 웹사이트 다만 https://web.archive.[...] 세계飛び地領土研究会
[235] 웹사이트 산주앙 바티스타 데 아주다 https://web.archive.[...] 세계飛び地領土研究会
[236] 논문 (정보 부족) 2003
[237] 논문 (정보 부족) 2008
[238] 논문 (정보 부족) 2008
[239] 일반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